그룬드만은 유럽에서 청나라 해관원 채용공고를 보고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사람이다. 볼프강 그룬드만(Wolfgang Hans Max Grundmann, ? ~ 1918)은 1886년 청나라에 건너와 고륜만(顧倫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2월 22일자로 영파(Ningpo Customs)해관에 첫 배치를 받았고 내근직 방판이 되었다. 성실히 근무하여 입사 2년만에 승진하고 타이난(대만 소재)해관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마침 조선해관 근무 희망자를 찾고 있던 북경 총해관에 지원의사를 밝혔다. 1891년 12월 승진하고 파견이 확정된 그룬
“나, 남정규(Nam Chong Kiu)는 오늘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그 직무를 시작함에 있어,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임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본 공사관 관리의 모든 명령과 지시를 엄격히 준수하며 허락없이 수행하는 일을 통해 또는 이유로 어떠한 정보도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자발적으로 이해심을 갖고 거리낌 없이 맹세하였습니다.”1899년 4월 15일 서울 미국공사관, 한국인 남정규(南廷奎 ?~?)는 공사관 통역관으로 임명되는 이 자리에서 25세의 젊은 대리공사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1
1886년 5월 1일, 청나라 해관의 최고 실권자 로버트 하트(Robert Hart)는 “나는 쉐니케, 피리와 크릭을 메릴 통제 하에 있는 조선 항구를 책임지기 위해 보낸다”는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얼마 뒤 크릭은 몇 동료들과 함께 기선편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구한말 우리기록에 격류(格類)라는 인물이 직후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의 본명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크릭 (Edward Fitzgerald Creagh, 1850~1902), 성씨(姓)에서 아일랜드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는 1860년대 말 영국 버니스 아카데미를 졸업
명성황후와 변석운1884년경, 민비는 조카 민영소(閔泳韶) 앞으로 한 통의 짧은 편지를 보냈다. 형식적인 인사말을 제외하면 이 편지는 ‘변석운(邊錫運)’이라는 인물 때문에 쓰여진 것이었다. 민비는 “변석운이는 알외여 보아야 알게서나 쥬사가 너모 만아 더러주린다 하오시니가 아마 못 될 듯 하다” (변석운은 아뢰보아야 알겠으나 주사가 너무 많아 덜어 줄인다 하오시니까 아마 못 될 듯 하다) 라며 썼다. 문맥으로 보아 분명 일전에 민영소가 인사청탁 것에 대해 내린 답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언급된 변석운이라는 인물은 과거급제가 아니었다.
1922년 8월 27일, 개방지역인 중국 안동(현재의 단동) 중국인마을에서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경찰 지휘하에 있던 밀정 등의 협조를 받아 한 조선인을 불법체포해 간 사건이 일어났다. 체포 직후 그를 되찾기 위해 추격한 다수의 중국인에 대해 신변 위협을 느낀 일경이 발포하고 행인이 총탄에 부상을 입는 살벌한 장면까지 펼쳐졌다. 중국정부는 이것을 심각한 주권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외교채널을 통해 강력 항의하는 한편, 피체포자에 대한 즉각적 송환, 체포 경찰관의 처벌, 재발방지 등을 요구했다. 고용주인 영국인 ‘쇼’(George L. Sh
현재 세관도 그러하지만 구한말 해관에도 다양한 업무 분야가 존재했다. 통관 사무를 담당하거나 화물 검사와 가격평가를 담당했던 직원도, 선편으로 착발하는 여행객의 짐과 화물을 수색검사하거나 보세구역을 순찰하는 직원도 있었다. 물론 소소하게 경비일이나 서울과 해관간에 문서수발의 심부름을 하고 선박에 노를 젓던 수부에 목수와 화폐 진위를 감정하는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인적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청나라 해관은 입출항하는 무역선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특별한 밀수정보가 있을 때 단속할 목적으로 선박을 직접 운용했다. 필요하면 문제의 선박을 정선
1881년 조선 정부는 개항으로 인해 발전한 문물을 견학하기 위해 대규모로 ‘조사시찰단’을 꾸려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저 일개 무명 선비에 지나지 않았던 23세 유기환(兪箕煥, 1858~1902.8.26.) 이라는 이름은 수행원 명단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미스테리한 이 인물은 승지 조병직(趙秉稷)이 이끄는 수행원에 당당히 선발된 것이다. 조병직은 일본 세관을 연구하는 책임을 진 3개 팀중 하나를 맡고 있었다. 유기환은 4개월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부지런히 이세관행정을 시찰했고 보고 들은 바를 보고서로 만들어 고종에게 제출했다
승정원일기 1893년 11월 9일자 기록을 보자. 이날 고종은 건청궁에서 그해 1월 미국 콜롬비아 만국박람회 조선측 대표로 있다 복귀한 출품사무대원 정경원을 불러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중간에 “박용규와 서병규(徐丙珪)는 영어를 잘 하던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정경원은 “영어를 잘 하는 일은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병규는 겨우 말을 통할 수 있었고 박용규는 영어를 배운 지가 이미 10여년이 넘었으므로 조금 나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적이 없었는데 이미 미국에 유학생 서병규와 박용규 라
하인리히 빌헤름 라흐트 [羅五學, 羅夫 ?~1920. 4.]는 독일 국적 이외는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이다. 1882. 2월 들어 청나라 해관에서 운영하는 등대의 간수 견습생으로 입사하면서 해관과 첫 인연을 맺고 ‘루오디(羅棣)’라는 청나라식 이름을 얻었다.등대원들은 고학력이 필요치 않아 영어를 구사하는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취업이 쉬웠다. 그러나 그만큼 일반 해관원에 비해 승진기회도 적었고 대우가 낮았다. 그는 샹하이 해관의 등대선 ‘키우토안’ (Kiutoan)에 탑승하여 야간에 등화를 제공하고 안개 낀 날에는 타종을 하는 단조로
“임시변통으로 영어를 다소 알고 있는 ‘강준(姜準)’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화석의 아들에게 부탁해 잠시 홍우관(洪禹觀)의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강준은 1887년 12월 20일 부터 우리 해관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본관은 그가 하는 맡은 일에 대해 급여 수준을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1887. 12. 28. 인천해관 서리세무사 쉐니케가 총세무사에게 발송한 공문에서 발췌)인천 개항 후 4년, ‘강준’이라는 한 인물이 제물포에 등장한다. 아마 인천해관의 해관원으로 채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20대였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이 개항하
조선해관에 근무를 원했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은 어떠한 점 때문에 입국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청나라 해관에 비해 급여와 승진체계 그리고 복지 수준이 좋았던 탓도 있겠지만, 서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대한 호기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개중에는 돌아가지 않고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다 이 땅에 묻힌 사람들도 있다. 해관원을 그만두고 무역에 뛰어들거나, 광산개발, 외국어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하며 조선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조선해관의 창설 멤버로 왔다가 대한제
덕국인 모세을 (F. H. Mörsel 毛世乙). 그는 독일인으로서 1883년부터 20년이 넘도록 이 땅에 체류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있다.첫 입국은 국적을 볼 때 같은 나라 사람인 묄렌도르프와의 연줄이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행 증기선에 단체로 승선한 조선해관 창설멤버 명단을 통해 그가 청나라에서 얼마간 체류했다가 상하이를 경유해 조선에 도착하였다는 정황이 드러날 뿐, 이전에 사업을 했는지, 어느 조직에 몸을 담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는 아예 찾을 수 없다. 1885년, 청국의 요구로 묄렌도르프가 총세무사직에서 해임되고
“셰관에셔 셔긔 하던 아라샤 사람 본뢰튼펄트씨는 죠션 외부로 고립하야 이번에 구라파 각국 가난 공사 민영환씨와 갖치 가는데 본뢰튼펄트씨는 영어 법어 덕어 아어 쳥어를 다 잘 하고 구라파 사정도 자셔히 아는지라 죠션 공사와 이번에 갖치 가난거슨 죠션 졍부에 매우 유조한 일이더라.” [1897년 3월 23일 독립신문]이 기사를 현대어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다.“세관에서 서기직에 있던 러시아 사람 폰 로텐펠트씨는 조선 외부(外部)에서 고립(雇立, 사람을 대신 사서 공무를 시키는 것)하여 이번에 유럽 각국을 방문하는 공사 민영환씨와 동
이중원 (李重元 1864~1911), 그는 1864년 서울태생으로 가정에서 한학을 익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직접 작성한 이력서에는 1882년과 1883년에 관립영어학교 즉, ‘동문학’ 제1기생으로 입학한 것으로 나타난다. 1890년 1월 정부가 서리총세무사였던 ‘쉐니케’에게 보낸 공문에 따르면 “본 아문의 동문학 영어학원(本衙門同文學英語學員) 이중원이 영문, 영어를 깨우쳤으니 인천해관사무에 충원하여 방판업무를 맡기고 심노한과 강준의 예에 따라 급여를 지급하라”는 내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사유로 동문학 수료
오이슨 (歐森 James Frederick Oiesen)은 덴마크 보른홀름 섬의 뢰네 (Ronne)출신이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미국 펜실베니아주 워렌(Warren)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20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으나 장래 희망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대진학을 눈앞에 둔 시점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꿈을 포기하고 지역 의사의 통역사로 경제활동에 나서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 길은 그러나 훗날 그의 인생 진로를 바꾸는 탁월한 한 수가 되었다.1876
조선에 처음으로 ‘자전거’를 소개한 사람으로 유명한 보리오니(富理安來 補理五浬 Borioni, Ferruccio Romolo Const, 1863~1920)는 이탈리아의 유명 항구도시 제노바 출신이다. 채 20세에 이르기 전에 청나라에 입국했고 1883년 4월 해관에 입사했으나 자세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외근직(Outdoor Staff) 말단인 경비원(Watcher)으로 샹하이 해관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1개월 정도 근무하는 동안 조선해관 창설소식을 접했고 해관원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현지에서 묄렌도르프를 만났다.
아버지 고진풍 중국어 역관, 큰형 고영주, 둘째 고영선 중국어 역관, 셋째 고영희 일본어 역관, 본인과 아들도 각각 중국어 역관, 프랑스어 역관이었던 역관집안 막내 아들 고영철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중에 가장 알려진 인물은 손위 형이던 고영희,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개항하던 시기 통역관으로 수신사를 수행했고 이후 친일로 돌아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탁지부대신, 법부대신으로 승승장구하다 끝내 나라마저 판 정미7적, 경술국적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영원히 남겼다, 아들 고희동은 대한제국이 기울자 역관직을 던져 버
중인 출신이었던 진상언(秦尙彦)은 24세이던 1881년 9월 26일, 김윤식이 이끄는 영선사 수행원에 포함되어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조선 정부는 앞서 개화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임을 인식하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우선 청나라를 벤치마킹하기로 하고 학생들을 보낼 방침을 정했다. 선발과정은 확실치 않으나 청나라의 앞선 기기제조 기술과 군사훈련 습득 등 목적으로 유학생 38명을 뽑을 때 그가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따라간 학도들의 학습은 중도 귀국자가 많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역시 학습과정을 마무리 못한 채
구한말에 등장하는 조선인 이완복(李完福), 해관문서 이외에 이 사람에 대한 확인된 출생지, 나이 등 기초적 정보도 확인할 수 없다. 불행이지만 그가 그날 당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실명 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채 무명인으로 영영 사라질 뻔 했다. 그는 서울 총해관 소속이었고 맡은 일은 총해관과 인천해관간 왕래하는 문서를 수발하는, 사람들은 이완복을 가르켜 3호 ‘신차인(信差人)’ 또는 ‘보행군(步行軍)’이라 불렀다. 총해관이 있던 서울 정동과 인천 제물포간 길 약 40km를 문서나 소포물을 걸어 다니며 나른다는 것은 상당히 힘에 부치는
린드홀름(Knud Herluf Lindholm)은 덴마크인으로서 1866년 3월 덴마크 헤스홀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Wilhelm von Lindholm)가 남작작위를 가진 귀족가문 출생이었던 탓에 고등교육을 받고 유복하게 성장했다. 21세 되던 1887년, 영국에서 모집한 청나라해관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후 청나라로 건너가 내근직 방판(Indoor Staff, Assistant)으로 임용되었다. 북경의 해관원 교육기관인 동문관(同文館)에서 중국어를 배웠으며 1889년 하문해관(Amoy)에 첫 배치되었다. 그리고 1891년 광저